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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시5

[좋은시] 문정희- 부부 ​부부 - 문정희 부부란 무더운 여름밤 멀찍이 잠을 청하다가 어둠 속에서 앵하고 모기 소리가 들리면 순식간에 둘이 합세하여 모기를 잡는 사이이다. 너무 많이 짜진 연고를 나누어 바르는 사이이다. 남편이 턱에 바르고 남은 밥풀꽃 만한 연고를 손끝에 들고 어디 나머지를 바를 만한 곳이 없나 찾고 있을 때 아내가 주저 없이 치마를 걷고 배꼽 부근을 내어 미는 사이이다 그 자리를 문지르며 이 달에 너무 많이 사용한 신용카드와 전기세를 문득 떠올리는 사이이다 결혼은 사랑을 무효화시키는 긴 과정이지만 결혼한 사랑은 사랑이 아니지만 부부란 어떤 이름으로도 잴 수 없는 백 년이 지나도 남는 암각화처럼 그것이 풍화하는 긴 과정과 그 곁에 가뭇없이 피고 지는 풀꽃 더미를 풍경으로 거느린다 나에게 남은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 2015. 6. 2.
[좋은시] 문정희 -응 응 - 詩문정희 햇살 가득한 대낮 지금 나하고 하고 싶어? 네가 물었을 때 꽃처럼 피어난 나의 문자 文字 "응" 동그란 해로 너 내 위에 떠 있고 동그란 달로 나 네 아래 떠 있는 이 눈부신 언어의 체위 오직 심장으로 나란히 당도한 신의 방 너와 내가 만든 아름다운 완성 해와 달 지평선에 함께 떠있는 땅 위에 제일 평화롭고 뜨거운 대답 "응" 2015. 5. 18.
[좋은시] 유인숙-좋은 사람이 되고싶다 좋은 사람이 되고싶다 유인숙 아, 내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메어야 할 짐이 있다면 찡그린 얼굴로 돌아서거나 버거워하지 않는 삶 하찮은 것조차 기뻐하는 삶이고 싶다 한순간이라도 서로의 짐을 나누어지고 때로는 그 삶의 무게만큼 기울어져 힘이 들어도 나에게 주어진 몫이거니 기꺼운 마음으로 순응하고 싶다 사랑을 가슴으로 품고 주고 또 주어도 달라하지 않는 소망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그의 눈빛을 보며 기다릴 줄 아는 자가 되고싶다 슬픔도 안으로 끌어안고 기쁨도 가슴에 담을 줄 아는 그래서 행복하다고 노래할 줄 아는 가장 소중한 사람의 참 좋은 사랑이 되고 싶다 2015. 5. 18.
[좋은시] 게리소토 -오렌지 -게리소토 처음 여자아이와 함께 걸었을 때 난 열두 살이었고 추웠고 웃옷 안주머니에 든 오렌지 두 개가 무거웠지 12월 그녀의 집까지 걸어가는 동안 발 밑에서 살얼음이 갈라졌고 입김이 내 앞에 나타났다 사라졌지 날씨와 무관하게 밤이나 낮이나 현관 전등이 노랗게 불타고 있는 곳 개는 나를 보고 짖었고 그녀는 밖으로 나와 장갑을 끌어올렸지 얼굴이 연분홍색으로 밝게 빛났지 나는 미소 지으며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고 거리로 데려갔지 중고차 매장과 일렬로 늘어선 새로 심은 나무들을 지나 한 상점 앞에서 숨을 돌렸지 우리는 안으로 들어갔고 작은 종이 울리자 주인 아주머니가 상품들이 진열된 좁은 복도에 나타났지 나는 관중석처럼 늘어선 사탕들 앞으로 가서 그녀에게 무엇을 갖고 싶은지 물었지 그녀의 눈에는.. 2015. 5.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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